AI 도입·전략 · 2026-10-30 · KNOWVERSE

고속도로는 뚫었는데, 톨게이트는 그대로입니다

AI를 많이 쓰기 시작한 뒤, 코드 리뷰를 기다리는 시간이 다섯 배가 됐습니다.

미국의 엔지니어링 데이터 분석 회사 Faros AI가 올해 2분기 보고서에서 내놓은 숫자입니다. 2년 동안 개발자 2만 2천 명, 4천여 개 팀의 실제 작업 기록을 놓고, 같은 조직 안에서 AI를 적게 쓸 때와 많이 쓸 때를 비교했습니다. 처리한 작업은 34% 가까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리뷰 대기 시간은 다섯 배가 됐고, 주당 배포 횟수는 오히려 12% 가까이 줄었습니다. 더 많이 만들고, 덜 내보낸 겁니다.

파울 클레 화풍의 그림. 여러 색 차선 위를 작은 사람들이 바삐 걷는데, 모든 길이 좁은 부스 하나로 모여 그 앞에 줄이 늘어서 있다.

최근 쓰레드에서 이 숫자를 인용한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두 번째 창업 중인 공동창업자 두 사람이 1년 동안 둘이서 'AI 네이티브 회사'를 꾸려 본 기록인데, 결론이 분명합니다. 팀 구성을 예전 방식 그대로 두면 AI로 얻은 생산성은 거의 다 희석된다는 거죠. 저도 대기업 IT전략과 CTO, 컨설팅 현장에서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봤습니다.

1. 일은 하루, 넘기는 데 사흘

기획, 디자인, 개발, 테스트로 나눠 결과물을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구조는 만드는 일이 가장 오래 걸리던 시절의 정답이었습니다. 지금은 만드는 구간이 가장 짧습니다. 남은 시간은 넘기고 기다리고 맞추는 데 쓰입니다. 한 사람이 AI로 하루 만에 끝내도 다음 사람 손에 닿기까지 사흘이 걸리면, 그건 결국 사흘짜리 일입니다.

국내 기업에는 여기에 한 겹이 더 있습니다. 결재선입니다. 담당자가 오전에 AI로 보고서 초안을 끝내도 팀장, 실장, 본부장 결재를 거치면 일주일이 갑니다. 저는 이걸 '넘김 비용'이라고 부릅니다. AI는 만드는 비용을 거의 0으로 만들었지만, 넘김 비용은 한 푼도 깎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만드는 양이 늘어난 만큼 넘김 구간 앞에 줄이 길어졌죠. Faros의 숫자가 바로 그 줄입니다.

2. 빨리 끝내면 손해 보는 구조

직원 입장에서 보면 더 선명합니다. 전체 공정의 한 칸만 맡은 사람이 AI로 자기 몫을 반나절 만에 끝내면 무엇이 돌아올까요? 다음 일이 주어지거나, 앞뒤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만 남습니다. 결과물이 고객에게 닿으려면 여전히 남의 손을 거쳐야 하니 성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아낀 시간을 조용히 남겨 두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 됩니다. 저는 이걸 게으름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구조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겁니다. AI 활용률은 올랐는데 생산성은 그대로라는 고민의 답은 대개 도구가 아니라 일의 단위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한 영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야, 빨리 끝낸 만큼이 그 사람의 성과가 되니까요.

3. 중간관리자를 없앤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잭 도시의 Block은 올해 3월, 세쿼이아의 로엘로프 보타와 함께 쓴 글에서 정보를 위아래로 나르고 부서 간 보조를 맞추던 중간관리의 역할을 AI 시스템에 맡기겠다고 밝혔습니다. 조직은 실무자, 특정 결과를 책임지는 DRI, 직접 일하면서 사람을 키우는 플레이어코치로 다시 짰습니다.

국내 기업이 이걸 그대로 따라 하긴 어렵습니다. 인력을 줄이기 쉽지 않고, 직급이 곧 처우인 회사도 많습니다. 근데 따라 할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핵심은 관리자를 줄이는 게 아니라, 누가 끝까지 책임지느냐를 정하는 데 있으니까요.

오히려 조심해야 할 함정이 있습니다. 중간 단계를 걷어냈는데 서로를 믿지 못하면, 모든 결정이 다시 위로 올라옵니다. 쓰레드의 글쓴이도 같은 경고를 합니다. 중간관리를 없앴더니 대표 한 명이 회사 전체의 중간관리자가 되더라는 거죠. 새 병목은 사람 수가 아니라 신뢰입니다.

4. 다시 써야 할 문서는 전결 규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AI 도입을 시작하는 회사에 도구 목록보다 위임전결규정을 먼저 펼쳐 보자고 말씀드립니다. 어느 금액, 어느 범위까지 담당자가 혼자 결정하는지 적어 둔 문서 말입니다. 대부분 만드는 데 오래 걸리고 실수 비용이 크다는 전제 위에서 쓰였습니다.

그 전제가 바뀌었습니다. 초안은 몇 분이면 나오고, 틀리면 다시 만들면 됩니다. 그렇다면 승인 없이 해도 되는 범위는 넓히고, 정말 되돌리기 어려운 결정만 위로 올리도록 다시 써야 합니다. 리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다 보는 리뷰가 아니라, 무엇을 꼭 봐야 하는지 정해 둔 리뷰여야 줄이 줄어듭니다.

쓰레드의 글쓴이는 지금의 많은 회사를 고속도로를 뚫어 놓고 톨게이트는 한두 칸만 열어 둔 모습에 비유했습니다. 꽤 정확한 비유입니다. 우리 회사는 지금 차선을 늘리고 있나요, 톨게이트를 열고 있나요?

이렇게 점검해 보시면 어떨까요?

AI로 빨라진 업무가 고객에게 닿기까지 몇 번의 넘김과 결재를 거치나요?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영역이 정해져 있나요?
승인 없이 해도 되는 범위가 문서로 적혀 있나요?

셋 다 답이 막힌다면, 다음에 살 것은 AI 라이선스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AI 도입에 맞춰 조직과 결재 구조를 함께 다시 그려 보고 싶으시다면 편하게 연락 주세요. 노우버스 AX 컨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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