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도입·전략 · 2026-10-17 · KNOWVERSE

직함은 그대로인데, 일은 이미 옆 부서로 넘어갔습니다

미국 직장인들이 ChatGPT에 보낸 업무 메시지 80만 건을 살펴보니, 자기 직무와 관련된 질문 10건 중 4건 이상이 사실은 ‘남의 일’이었습니다.

OpenAI가 7월 말에 발표한 보고서 「Work at the Frontier」에 따르면, 글쓰기·요약·일정 관리처럼 누구나 하는 일을 빼고 나면 남은 메시지의 43.5%가 원래 다른 직군이 하던 업무였습니다. 고객경험 담당자는 77%, 디자이너는 75%, 인사 담당자는 69%가 그랬습니다. 마케터가 웹사이트 오류를 직접 고치고, 영업 담당자가 분석가에게 넘기던 고객 데이터를 직접 처리하고, 인사 담당자가 재무 계산을 합니다. OpenAI는 이걸 ‘업무 교차’라고 불렀습니다.

경계선이 흐려진 여러 칸의 사무실을 오가는 사람들과 그 위를 떠도는 서류·화살표 — 파울 클레 화풍

9월에 나온 후속 연구는 더 주목할 만합니다. 같은 사람 6,200여 명을 4월부터 7월까지 추적했더니, 한 번 해 본 남의 업무가 직무 관련 AI 사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3.1%에서 25.9%로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호기심에 한 번 해 본 게 아니라 일상 업무로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죠. 고객과 상품을 상담하는 일은 54%, 광고 문구 작성은 44%가 다음 달에도 다시 했습니다.

저는 이 숫자를 보면서 “AI가 일자리를 뺏느냐”는 익숙한 질문보다 더 현실적인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회사 조직도와 직무기술서는 지금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반영하고 있을까요?

1. 직함보다 일이 먼저 움직입니다

보고서의 결론은 의외로 담담합니다. 직함은 그대로인데 업무 묶음이 먼저 바뀐다는 겁니다. 노동통계는 직무기술서와 채용공고가 바뀐 뒤에야 이 변화를 잡아냅니다. 그 사이에 공백이 생깁니다.

저는 이 공백에서 생기는 일을 ‘그림자 R&R’이라고 부릅니다. 문서상으로는 마케팅팀 업무가 아닌데, 실제로는 마케터가 매주 하고 있는 일입니다. 30년 가까이 대기업 IT 전략과 컨설팅 현장에 몸담으며 느낀 건, 한국 조직은 R&R이 유난히 단단하다는 점입니다. 남의 일을 하면 성과로 인정받기보다 월권 소리를 듣기 쉽습니다. 그러니 AI로 옆 부서 일을 처리한 직원은 그 사실을 굳이 드러내지 않습니다. 회사는 업무가 어디로 옮겨가고 있는지 모른 채 예전 조직도로 사람을 뽑고 평가하게 되죠.

2. 빌려 온 전문성에는 검수자가 필요합니다

후속 연구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분야 밖의 일을 물을 때 질문을 더 짧게 쓰고, 설명이나 방법은 덜 묻습니다. 대신 예시와 배경 자료를 더 붙이고, “이거 맞는지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더 자주 합니다. 새 분야를 배우는 게 아니라 당장 필요한 전문성을 잠깐 빌려 쓰는 겁니다.

빌린 전문성은 편리하지만 위험합니다. OpenAI도 이 결과물이 실제로 쓰였는지, 품질이 어땠는지, 전문가가 검토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마케터가 AI로 검토한 계약서나 영업 담당자가 AI로 계산한 할인 마진이 그대로 고객에게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라면 업무 교차를 막기보다 ‘어디서부터는 전문가 서명이 필요한가’를 먼저 정하겠습니다. 광고 문구는 마케터가 AI로 써도 되지만, 계약 조항과 재무 수치는 담당 부서가 마지막에 한 번 보는 식으로요. 금지 목록이 아니라 검수 지점 목록을 만드는 겁니다.

3. 작은 조직일수록 먼저, 더 크게 바뀝니다

보고서는 회사 규모 차이도 짚었습니다. 사용량이 보통인 직원을 기준으로, 2~5명이 함께 쓰는 워크스페이스에서는 업무 교차 비율이 18.9%, 100명이 넘는 곳에서는 16.3%였습니다. 차이는 크지 않지만 방향은 분명합니다. 물어볼 전문가가 옆자리에 없으면 사람들은 AI에게 묻습니다.

국내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에는 이게 기회입니다. 법무팀도 데이터 분석가도 없는 조직에서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의 폭이 넓어지니까요. 반대로 대기업은 전문 조직이 있다는 이유로 이 변화를 늦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공유 서비스 조직에 들어오는 요청 건수가 줄고 있다면, 일이 줄어든 게 아니라 현업이 AI로 직접 처리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직무기술서를 고치기 전에 로그부터 보십시오

OpenAI 보고서 요약부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정책 담당자를 향한 말이지만, 저는 기업에 더 필요한 말이라고 봅니다. 어떤 새로운 업무 묶음이 가능해지는지, 그리고 그 일을 할 준비가 된 사람, 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사람, 그 대가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순서는 간단합니다. 우리 직원들이 AI로 어떤 남의 일을 하고 있는지 먼저 봅니다. 그중 매달 반복되는 일은 공식 업무로 인정하고 평가에 반영합니다. 위험한 일에는 검수 지점을 둡니다. 직무기술서는 그다음에 고칩니다. 일은 이미 움직였습니다. 조직도만 아직 모를 뿐입니다.

우리 조직에서 업무가 어디로 옮겨가고 있는지 점검하고, AI 시대에 맞게 R&R과 검수 체계를 다시 설계하고 싶다면 노우버스의 AI 도입·활용 전략 컨설팅으로 문의해 주십시오. 현장에서 쓰는 점검 틀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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